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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 막부의 초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발자취와 연고지를 둘러보는 여행 【노년기~사후】 

지난 번에는 쇼군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유소년기~장년기를 보낸 연고지를 소개했습니다. (유소년기~장년기는 이곳으로)

수많은 전쟁에서 이름을 떨쳤던 이에야스는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으로 간토 지역으로 영지를 옮기게 되지만, 만년에는 ‘오고쇼(은퇴한 중진)’로서 다시 슨푸로 귀환하여 이곳에서 생을 마감한 후 구노산에 묻히는 등 시즈오카현은 이에야스의 생애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으며 많은 연고지가 있습니다.

이번에는 ‘세키가하라 전투’와 관련된 ‘후지산 혼구 센겐타이샤 신사’와 이에야스가 만년을 보낸 슨푸성, 이에야스의 시신이 묻혀 있다고 알려져 있는 ‘구노산 도쇼구 신사’ 등을 소개합니다.

노년기~천하를 거머쥔 쇼군이 되다! ~

다케다 가문의 쇠퇴와 함께 스루가국을 영지 중 하나로 삼은 이에야스는 거성을 하마마쓰성에서 슨푸성으로 옮기기로 하고 1589년에 축성을 완성하지만, 이듬해 간파쿠(정무를 총괄하는 직위)인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에 따라 간토 지역으로 영지를 옮기게 됩니다.

그러나 히데요시의 사후 최대 실력자로서 천하를 거머쥐며 1600년, 천하를 건 승패의 갈림길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동군을 이끌고 이시다 미쓰나리가 지휘하는 서군에 승리하자 1603년, 62세의 나이로 쇼군(정이대장군)이 되어 에도 막부를 열게 되었습니다.

후지산 혼구 센겐타이샤 신사(후지노미야시)

후지산 혼구 센겐타이샤 신사는 JR 미노부선 후지노미야역에서 도보로 약 10분 거리의 후지노미야시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일본 전국에 1,300여 개가 있는 센겐 신사의 총본사로 예로부터 후지산을 신체로 섬기며 센겐 신앙의 중심지로 알려져 있는데, 후지산의 8부 능선 이상은 후지산 혼구 센겐타이샤 신사의 경내 부지라는 것은 이에야스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한 이에야스는 1604년에 전승의 보답으로 센겐타이샤 신사의 혼덴(신령을 안치한 건물), 하이덴(배례를 올리는 건물), 누문 등 30여 동에 이르는 웅장한 샤덴(신사의 건물)을 조영합니다.

게다가 1609년에는 후지산 정상(오쿠미야)에 봉납된 새전을 센겐타이샤 신사의 신전 수리비로 충당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는 이에야스가 후지산 정상의 토지는 센겐타이샤 신사의 경내 부지라고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후, 몇몇 신사와 절이 후지산 정상의 소유권을 주장하여 논란이 일었는데, 1779년, 에도 막부는 정식으로 후지산 8부 능선 이상을 센겐타이샤 신사의 경내 부지라고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이 결정에는 과거 이에야스의 의향이 크게 관여했다고 생각됩니다.

현재 센겐타이샤 신사의 샤덴은 혼덴, 헤이덴(참배자가 봉납품을 올리는 건물), 하이덴, 누문이 남아 있으며 혼덴은 국가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또한, 후지산의 용암 사이에서 솟아나온 지하수가 연못이 된 와쿠타마 연못은 국가특별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19~20세기 헤이세이의 명수 100선에도 선정되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곳으로

만년~다시 슨푸로 돌아오다~

쇼군이 된 이에야스는 불과 2년 뒤인 1605년에 그 자리를 2대 쇼군 히데타다에게 물려주면서 이듬해 ‘오고쇼(은퇴한 중진)’로 다시 슨푸성에 거성하게 됩니다.

슨푸성 공원(시즈오카시)

슨푸성 공원은 JR 시즈오카역에서 도보로 약 15분 거리의 시즈오카 시가지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에야스는 슨푸 입성에 즈음해 성 확장과 개보수를 실시하면서 슨푸의 구획 정비 및 대규모 아베강 치수 사업에 착수하였는데, 현재 시즈오카 시가지의 원형은 이때 만들어졌습니다.

당시 오고쇼 정치의 거점이었던 슨푸는 에도를 능가하였으며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이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그후 1635년, 슨푸 성하 마을의 화재로 연소되면서 천수각도 불에 탔지만, 1989년에 시즈오카 시제 100주년 기념사업으로 니노마루 남동쪽의 다쓰미 망루가 복원되면서 이후 히가시고몬, 니노마루 남서쪽 히쓰지사루 망루 등도 복원되어 현재는 ‘슨푸성 공원’으로 시민들의 휴식처가 되었습니다.

또한, 2016년부터 시작된 천수대 발굴조사에서 그 크기가 남북으로 68m, 동서로 61m에 이르러 에도성(45m×41m)을 훨씬 능가하여 유례없는 거대한 규모였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곳으로

세이켄지 절(시즈오카시)

세이켄지 절은 시즈오카시 시미즈구, JR 오키쓰역에서 도보로 약 15분 거리에 있으며 바로 아래에는 기요미가타와 미호의 마쓰바라 절경을 볼 수 있는 고지대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8~9세기 나라 시대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며, 특히 14~16세기 무로마치 시대에는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깊이 숭경한 곳으로 일본을 대표하는 10개 사찰인 ‘전국 10개 사찰’에 꼽히는 등 크게 번성했던 곳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15~16세기 센고쿠 시대에 접어들면서 교통의 요충지라는 입지로 인해 종종 전화에 휘말려 경내는 황폐해지고 말았습니다.

이를 재건한 사람이 이에야스가 이마가와 가문의 인질로 지냈던 유소년 시절에 교육을 담당한 다이겐 셋사이 선사라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슨푸성을 거성으로 삼은 이에야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으킨 임진왜란으로 단절되었던 조선왕조와의 국교를 회복하고자 1607년에 467명의 조선사절단(조선통신사)을 슨푸성으로 초청하여 세이켄지 절을 숙소로 제공했습니다.

조선통신사는 1811년까지 12차례에 걸쳐 일본을 방문하였으며 그 동안 세이켄지 절은 일본과 조선의 문화 교류가 펼쳐지는 장으로서 이에야스가 추진한 평화 외교의 상징적인 존재가 되었습니다.

현재의 세이켄지 절에는 통신사의 현판과 많은 시서 등이 남아 있으며, 이곳에서 소장하고 있는 통신사 시서 48점을 포함한 조선통신사에 관한 기록은 유네스코의 세계기록(구 세계기록유산)에도 등재되는 등 세계적으로 귀중한 문화재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또한, 세이켄지 절의 정원은 국가 명승지로 지정되어 있으며 이에야스가 접목했다는 매화나무, 와룡매 등을 볼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곳으로

사후~이에야스, 신이 되다~

만년을 ‘오고쇼’로 슨푸성에 머물며 1614~1615년, 오사카 겨울 전투와 여름 전투에서 도요토미 가문을 멸망시킨 이에야스는 1616년, 75세의 나이로 그 생애를 마감하며 유언에 따라 구노산에 묻히게 되었습니다.

구노산 도쇼구 신사(시즈오카시)

구노산 도쇼구 신사는 시즈오카시 스루가구, 스루가만을 눈 아래로 조망하는 구노산 정상 부근에 위치하고 있으며 참배를 하려면 니혼다이라산 정상에서 로프웨이를 이용하거나 스루가만 쪽의 구노 산록에서 1159개의 계단으로 올라가는 방법이 있습니다.

이에야스의 ‘시신은 스루가국의 구노산에 묻고, 에도의 조조지 절에서 장례를 치르고, 미카와국의 다이주지 절에 위패를 봉납하고 1주기가 지나면 시모쓰케국의 닛코산에 작은 사당을 지어 권청하라. 간핫슈(지금의 간토 지역)의 수호신이 될 것이다’라는 유언 따라 창건되었습니다.

살아 생전 온갖 간난신고 끝에 전란의 세상에 종지부를 찍고 260여 년에 걸친 태평성대의 초석을 마련한 이에야스는 조정으로부터 ‘도쇼다이콘겐(東照大権現)’이라는 신의 칭호를 하사 받아 제신으로서 평화의 수호신, 국가를 진호하는 신으로서 조정과 막부로부터 두터운 숭경을 받게 되었습니다.

구노산 도쇼구 신사는 당시 최고의 건축 기술과 예술을 결집하여 건립되었으며, ‘곤겐즈쿠리’라고 불리는 옻칠, 극채색의 샤덴은 닛코 도쇼구 신사를 비롯해 훗날 일본 전국에서 다수 조영되는 도쇼구 신사의 기원으로서 원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2006년에 샤덴의 옻칠을 완료하여 웅장하고 화려한 옛 모습을 재현하였으며 2010년에는 에도 초기의 대표적인 건조물로 혼덴, 이시노마(혼덴과 하이덴을 연결하는 공간), 하이덴이 국보로 지정되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곳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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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의 이에야스라면 일본의 최고 권력자였기에 쇼군직을 2대 히데타다에게 물려준 후에는 아마도 일본 어디든 원하는 곳에 살 수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이에야스는 왜 여생을 보낼 곳으로, 또 자신을 묻을 땅으로 이곳을 선택했던 것일까요?

서쪽으로 아베강, 오이강, 동쪽으로 후지강과 하코네의 산세가 험한 지대가 있어 간토 지역을 방위하는 거점으로 전략적인 의미가 있었다는 점도 생각할 수 있지만, 이에야스는 분명 그 이상으로 간난신고의 나날 속에서 젊은 날을 보냈던 이 땅의 풍토와 이곳에 사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그리워하며 언젠가 다시 이곳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 시즈오카 현민인 필자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시즈오카현의 대표적인 이에야스 연고지, 그중에서 몇 군데를 방문해 보았는데, 이에야스와 시즈오카현은 인연이 깊어 여기서는 소개할 수 없었던 연고지가 아직 많습니다.

이곳들을 직접 방문하고 이에야스의 발자취와 생애를 접해본다면 분명 일본의 역사를 더욱 즐길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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