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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 막부의 초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발자취와 연고지를 둘러보는 여행 【유소년기~장년기】

1603년부터 1868년의 메이지 유신까지 일본을 통치한 에도 막부의 창시자이자 초대 쇼군이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유소년기를 당시의 스루가국, 도토미국(지금의 시즈오카현 중서부)를 자신의 영토로 삼은 센고쿠 다이묘(지방 영주) 이마가와 가문의 인질로 슨푸(지금의 시즈오카시)에서 생활하였으며, 유력한 센고쿠 무장 중 한 명인이었던 오다 노부나가와 동맹 관계에 있던 청장년기에는 하마마쓰성, 슨푸성을 거성으로 삼았습니다.

이번에는 유소년기부터 장년기까지 이에야스의 발자취를 찾아가며 연고지를 돌아보고자 합니다.

유소년기~이마가와 가문의 인질로서 슨푸에~

542년 미카와국(지금의 아이치현 동부) 오카자키 성주인 마쓰다이라 가문의 적자로 태어난 이에야스(아명: 마쓰다이라 다케치요)는 아버지인 히로타다 시절, 마쓰다이라 가문이 당시 막강한 센고쿠 다이묘였던 이마가와 가문의 산하로 들어가게 됨에 따라 충성에 대한 증거로 이마가와 가문의 인질이 되어 8세부터 19세까지 12년 동안 슨푸에서 지내게 되었습니다.

린자이지 절(시즈오카시)

린자이지 절은 시즈오카시 아오이구, 시즈오카 시가지에 있는 슨푸성 공원에서 도보로 약 25분 거리에 있으며 시즈오카 지명의 발상지로 알려진 시즈하타산 기슭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난세의 영웅 이마가와 가문의 선조를 모시는 보다이지 절(일가의 선조를 공양하는 묘지가 있는 절)로 이마가와 우지테루, 요시모토 등의 묘소와 역대 이마가와 가문 당주의 위패가 안치되어 있으며 이에야스가 이마가와 가문의 인질로 있던 유소년 시절,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참모이기도 했던 다이겐 셋사이 선사로부터 교육을 받아 무장으로서 윤리와 철학을 배운 땅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이후 1568년, 다케다 신겐의 스루가 침공이 시작되자 슨푸 성하 마을에 화재가 발생하여 린자이지 절의 전당도 잿더미로 변하고 마는데, 다케다 가문이 멸망한 후 스루가국을 영토로 삼은 이에야스가 1582년에 오기마치 덴노의 칙명을 받아 재건되었으며 이후에도 에도 막부의 극진한 비호를 받게 되었습니다.

현존하는 본당은 국가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으며, 지금은 ‘다케치요의 수학 공간(竹千代手習いの間)’이 복원되어 있습니다.

※ 린자이지 절은 린자이젠(린자이슈의 좌선) 수행 장소로 사용되므로 통상 비공개, 연 2회(5월 19일, 10월 15일)에 한해 일반 개방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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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즈오카 센겐 신사(시즈오카시)

시즈오카 센겐 신사는 슨푸성 공원에서 도보로 약 15분 정도 거리에 있으며 린자이지 절과 마찬가지로 시즈하타산 기슭에 위치(린자이지 절에서는 도보로 약 10분)하고 있습니다.

이에야스가 이마가와 가문의 인질로 있던 14세 때, 이 신사에서 관례를 거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마쓰다이라 다케치요는 관례 후, 마쓰다이라 모토야스라는 이름을 사용하게 됩니다.

이후 1581년, 이에야스는 다케다 가문을 공략하면서 전승을 기원하고 헤이지 이후에 반드시 재건할 것을 맹세하며 샤덴(신사의 건물)을 불태우고 신사 뒤에 있던 다케다 측의 시즈하타 산성을 공격해 멸망시켰습니다.

1586년에는 당시의 맹세를 이행하고자 도카이의 각국에 권진하여 샤덴을 재건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에야스는 평생 이 신사를 독실하게 숭경함에 따라 이 곳은 역대 도쿠가와 쇼군들의 기원을 올리는 장소가 되어 에도 막부의 극진한 비호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후에도 화재로 인해 여러 차례 소실되었으나, 현재 남아 있는 샤덴의 상당수는 1804년부터 60여 년의 세월과 10만 량(현재 화폐 기준로 약 100억 엔)의 거액을 들여 재건된 것으로 26동에 달하는 샤덴이 국가 중요문화재로 지정되는 호화스러운 건축군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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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마가와 가문의 인질로 지냈던 유소년 시절, 이에야스와 마쓰다이라 가문에게는 고난과 고뇌의 시기였지만, 반면에 다이겐 셋사이 선사는 일찍부터 무장으로서 이에야스의 재능을 발견하고 가르침에 따라 이에야스라는 인물의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어쩌면 시즈오카의 온화한 풍토, 풍요로운 사람과 자연이 훗날 천하를 거머쥔 사람으로 크게 성장해 나가는 이에야스의 유소년 시절의 바탕으로서 키워낸 것은 아닐까요?

청년~장년기~노부나가와의 동맹, 센고쿠 무장이 되다! ~

1560년, 오케하자마 전투에서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오다 노부나가에게 패전하자 이에야스(마쓰다이라 모토야스)는 기회를 틈타 미카와국으로 귀국합니다.

1562년, 오다 노부나가와 동맹을 맺고 이마가와 가문으로부터 독립하게 되자,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라고 이름을 바꾸며 센고쿠 다이묘로 성장하게 됩니다.

모토시로초 도쇼구 신사(히쿠마 성터)(하마마쓰시)

모토시로초 도쇼구 신사(히쿠마 성터)는 JR 하마마쓰역에서 도보로 약 15~20분이 소요되며 하마마쓰시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1568년, 이마가와 가문이 쇠퇴함에 따라 이에야스는 도토미국을 침공하는데 히쿠마성(고성)을 공략하여 성에 입성했습니다.

이후 성곽을 대폭 확대하고 고성의 서쪽에 쌓은 본성을 ‘하마마쓰성’이라 이름 붙였기에 ‘하마마쓰’라는 지명이 널리 퍼지게 되었고, 히쿠마성은 드넓은 하마마쓰성의 일대에 포함되게 되었습니다.

시간은 흘러 메이지 유신 이후인 1886년, 구 막부의 신하이자 하마마쓰 조다이(성을 지키는 직위)였던 이노우에 엔료가 과거 이에야스가 거성했던 히구마 성터에 이에야스를 모시는 도쇼구 신사를 건립하고자 이곳에 모토시로초 도쇼구 신사를 창건했습니다.

이 샤덴은 전화로 인해 소실되었으나 1958년에 재건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 히쿠마성은 이마가와 가문의 가신 이오 부센노카미가 성주였던 시절, 그의 휘하에 있던 마쓰시타 가문에 당시 아직 ‘원숭이’라 불리며 무명의 청년이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기노시타 도키치로)가 16~18세까지 3년간 고용되었던 곳이라고 합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도쿠가와 이에야스, 훗날 천하 통일을 이루게 될 두 영웅이 이 땅에서 무명 시절을 보내고 그후 온갖 고난을 딛고 크게 출세했다고 하여 현재의 모토시로초 도쇼구 신사는 두 명의 천하를 손에 쥔 사람을 배출한 최강의 파워 스폿인 ‘출세 신사’로 알려져 있으며 경내에는 두 사람의 동상도 설치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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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마마쓰성(하마마쓰시)

이에야스는 1569년부터 1586년까지, 29세부터 45세의 나이까지 17년을 하마마쓰성에 거성하며 젊은 시절을 보냈습니다. 이 시기, 오다 노부나가와는 동맹 관계였으며 이에 반해 적대적인 다케다 가문, 아자이·아사쿠라 가문 등과 격렬한 싸움의 소용돌이에 빠지게 됩니다.

후술하는 미카타가하라 전투, 다카텐진성 전투 외에도 아네가와 전투, 나가시노 전투, 고마키·나가쿠테 전투 등 센고쿠 역사상 유명한 수많은 격전이 벌어진 것도 이 시기의 일이었습니다.

하마마쓰성은 이후 18~19세기 에도 시대에도 도쿠가와 대대로 다이묘 가문들이 차례차례 머물면서 역대 성주들이 에도 막부의 중역으로 출세한 사례가 많아 ‘출세성’이라고도 합니다.

메이지 유신과 함께 폐성되었으나, 하마마쓰 성터는 1950년에 ‘하마마쓰성 공원’이 되었고 1958년에는 훗코텐슈(과거 성을 참고로 지어진 것)가 재건되었습니다.

현재의 하마마쓰성 공원은 벚꽃의 명소로도 알려진 시민들의 휴식처가 되었으며 천수각은 이에야스가 19세 때 착용하였다고 하는 긴다미 갑주(金陀美具足) 등 관련 물건들을 둘러볼 수 있는 자료관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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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가가게 자료관(하마마쓰시)

1573년, 가이(지금의 야마나시현)의 다케다 신겐은 오다 노부나가와 결전하고자 대군을 이끌고 교토로 향하지만, 도중에 이에야스가 거성하는 하마마쓰성을 무시하는 듯한 행군을 보이며 이에야스를 도발합니다.

격분한 이에야스는 성에서 치고 나가며 미카타가하라에서 결전을 벌이지만, 센고쿠 시대 최강자로 일컫던 다케다의 기마 군단 앞에서 대패하고 맙니다(미카타가하라 전투).

소수의 부하들과 함께 하마마쓰성으로 달아난 이에야스는 모든 성문을 개방하고 화톳불을 피워 이른바 ‘공성계(일부러 자신의 진지에 적을 초대해 적이 경계하게끔 만드는 전략)’로 추격해 온 다케다군의 맹장 야마가타 마사카게의 경계심을 부추겨 성안으로 진입하는 것을 주저하게 해 최대의 위기를 넘겼습니다.

대패한 이에야스였지만, 어떻게든 일격을 날리기 위해 사이가 절벽에 흰 천을 걸어 다리로 위장한 후 근처에서 야영하고 있던 다케다군에 기습을 가합니다.

지리에 익숙하지 않았던 다케다군은 혼란스러워하며 벼랑 아래로 떨어졌고 많은 사망자가 발생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사이가 절벽은 하마마쓰성의 북쪽 방면으로 1km 정도 거리에 위치한 계곡인데, 1939년에 미카타가하라 전투장으로서 시즈오카현 사적에 지정되었습니다.

또한, 가까운 사이가가케 자료관에서는 미카타가하라 전투 등에 관한 전시를 견학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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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텐진 성터(가케가와시)

다카텐진성은 지금의 가케가와시에 위치한 산성으로 ‘다카텐진을 차지하는 자 엔슈를 차지한다’고 일컬어졌던 요충지에 위치합니다.

해발 132m의 가쿠오산의 지형을 교묘히 활용하여 도카이 제일의 견루를 자랑하며 ‘난공불락의 명성’으로 불렸습니다.

이곳에서도 이에야스와 다케다 신겐·가쓰요리의 공방전이 펼쳐졌으며 센고쿠 역사상으로도 유명한 격전지였습니다.

1574년, 다케다 가쓰요리는 2만 5천 명의 병력을 동원해 다카텐진성을 공격(제1차 다카텐진성 전투)하는데 마침내 아버지인 신겐조차 함락하지 못한 다카텐진성을 공략하게 됩니다.

그러나 1575년, 나가시노 전투에서 다케다군이 오다·도쿠가와의 연합군에게 패하자 공세로 돌아선 도쿠가와군은 스와하라성 등 주위의 성을 함락시켜 다카텐진성의 보급로를 끊고 1580년 만에 총공격(제2차 다카텐진성 전투)을 개시합니다.

성주 오카베 모토노부도 격렬하게 항전하나, 군량 공세로 인해 다케다 가쓰요리도 원군을 보낼 수 없게 되자 이듬해인 1581년, 오카베를 필두로 성의 병사들이 성에서 치고 나가는 적진 돌격을 감행하여 대부분 전사하고 마는 장렬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지금의 다카텐진 성터는 2017년에 이어 일본 100대 명성에 선정되었으며, 국가 지정 사적으로 산책로도 정비되어 있습니다.

울창하게 우거진 삼나무와 편백나무로 뒤덮여 대낮에도 어두운 돌계단을 올라 산 정상으로 향하고 있자면 이 산 전체가 거대한 요새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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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마마쓰성을 재건축할 당시, 이에야스는 오다 노부나가의 동맹인로서 다케다 가문 등과의 격렬한 싸움의 소용돌이에 빠졌고 여기에서도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특히 미카타가하라 전투에서는 대패하여 구사일생으로 살아나는 경험도 했던 한편, 이 전투에서 이에야스가 막강한 다케다 가문에게도 잠자코 자신의 영지를 유린당하는 것을 결코 허락하지 않는 목숨을 걸고 영지를 지키는 영주로서의 의무를 다하는 무장이었다는 것을 내외적으로 알렸던 전투였다고도 합니다.

이렇게 해서 이에야스는 하마마쓰에서 ‘도카이도 제일의 무장’으로 이름을 떨치며 훗날 천하를 손에 거머쥐기 위한 발판을 마련했습니다.

‘출세의 거리’ 하마마쓰라는 지역이 가진 활기, 이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지닌 열기가 이에야스에게도 힘을 실어주며 젊은 날의 이에야스에게 천하를 거머쥘 힘을 키우게 해준 것은 아닐까요?

후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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